
최근 카카오뱅크에서 올라온 AI 기획자 채용 공고를 우연히 접했다. ‘AI 기획자’라는 잡 타이틀이 등장한지는 꽤 됐지만, 지금까지는 (신생 포지션이 으레 그렇듯)기존의 기획자의 역할과 JD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카카오페이의 AI 기획자 공고와 인터뷰에서는 ‘AI 기획자’의 잡 포지션의 역할을 고민하며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 팀의 인터뷰를 읽어보니, 기존 기획자와는 다른 역할을 해야한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그 역할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느낌도 동시에 받았다. 그럼에도, “기존의 기획자와 구별되는 AI 기획자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우대사항에 ‘AI 에이전트에 대한 폭넓고 다양한 경험과 스터디를 하고 있는 분’이라는 조건이 붙어있는 점, 인터뷰 중 ‘단순히 툴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개발, 기획, 디자인, 운영 등 모든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것을 언급했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그리고 ‘기획자’와 구분되는 'AI 기획자'라는 잡 타이틀을 표방한다면, 그 차별점은 무엇이어야 할지 의문이 생겼다.
내친김에 AI 기획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AI 개발자 입장에서 ‘AI 기획자는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정리해봤다(이래야 한다는 당위적인 주장은 아님을 밝힌다). 당연하게 들릴 수 있지만, AI가 포함된 서비스를 기획할 때는 데이터와 AI 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AI 기획자와 기존의 소프트웨어 기획자의 차별점은 "데이터로 AI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해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대입해 생각해보자면, PM(Product Manager)과 TPM(Technical Product Manager)이 구분되는 지점과 비슷하게 생각해볼 수 있겠다.
(최근 AI 기획/개발이라고 하면 생성형 AI, 특히 LLM에 관한 기획/개발을 주로 의미하지만, 이 글에서는 보다 폭 넓게 ML/DL/생성형 모델 등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AI’를 사용했음을 밝힌다)
AI 개발자와 AI 기획자
새로운 잡 포지션의 역할을 정할 때는, 기존의 가까운 잡 포지션의 역할과 구분되는 지점을 찾아보면 좋다. AI 개발자의 Job Description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다음 업무가 포함된다.
- 데이터 파이프라인 및 인프라 설계: 데이터 수집, DB 설계, ETL 파이프라인 개발, 데이터 전처리 자동화 등
- 모델 개발: 알고리즘 선정, 구현, 성능 개선, 모델 튜닝, 모델 모니터링 및 버전 관리 등
- 서비스 연동: MLOps, API 설계, 모델 배포, 성능 최적화 등
일반적으로 AI 개발자는 데이터, 알고리즘, 시스템을 기술적으로 다룬다면, 데이터 전략을 포함한 사업 기획, 서비스가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맞는 평가 지표 설정, 서비스 방향성 결정, 사업적 요구사항 정의, 협력 기관 관리, 마케팅 및 사업 운영 기획 등은 기획자 혹은 PM/PO의 역할로 볼 수 있다. AI 모델 개발 과정은 데이터로 시작해서 평가(지표/벤치마크)로 마무리된다. 이 두 지점에 대해서만이라도 이해가 있다면 프로젝트가 훨씬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기획자의 역할이 공백 상태이거나 이들에게 AI 관련 지식이 부족해 AI 개발자에게 의존하게 될 경우, 프로젝트가 제때 시작되지 못하거나 AI 개발자의 업무에 오버로드가 발생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과도기 상태에서는 기존의 기획자들에게 AI 제품을 새롭게 기획해야 하는 업무가 주어지기도 하는데, 만약 기획자에게 AI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AI 프로젝트를 기획한다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생각나는대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모델을 위한 데이터 수집 전략이 프로젝트 시작 이후에 논의되면서, 데이터가 제 때 수집되지 못하거나 품질이 낮아지고, 궁극적으로 모델의 성능을 하락시킨다.
- AI가 서비스 품질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지 판단하지 못하고, ‘일단 AI로 할 수 있는’ 기능을 넣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 AI 개발자의 기술적인 피드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현실적이지 않은 요구사항을 제시하거나, 개발 일정을 잘못 예측하게 된다.
- 1년 동안 AI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할 때, 데이터 수집→개발→테스트에 이르는 과정을 1년 동안 진행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단기간 안에 MVP를 만들고, 데이터를 추가 수집하고, 모델을 개선하는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
- 만들어진 AI 모델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비스가 달성하고자 하는 바와 연결되는 평가 지표나 각종 벤치마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이것에 따라 모델링 방향이 정해지기 마련이다. 생성형 AI의 경우 프로젝트에서 목표로 하는 기능을 specific하게 평가할 수 있는 벤치마크가 아직 없을 수도 있고, 이 경우 대안적인 지표 설계가 필요하다. 평가 지표가 정해지지 않으면 AI 개발자는 어떤 식으로 모델을 개선해야할지 헤메게 되며, 프로젝트 후반에 새로운 평가 기준을 급하게 만드는 문제를 겪기도 한다.
AI 제품 개발의 전제
첫째, AI가 포함되는 서비스의 경우, 데이터 자체가 서비스의 가치를 크게 좌우한다. 이는 기획 단계에서 데이터 자체가 하나의 주요한 포인트로서 논의되어야 함을 뜻한다.
둘째, AI 모델 성능은 많은 경우 "어떤 데이터를 얼마나 잘 모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타겟 예측 모델이라면 무엇을 예측할 것인지 명확히 정의하고, 타겟에 해당하는(혹은 준하는) 데이터를 충분히 모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기획 단계에서 사용자 특성(연령대, 성별 등)을 고려한 데이터 확보 전략을 세울 수 있다면 좋고, 데이터 윤리나 규제(개인정보 보호 등)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셋째, AI는 반복적 실험과 검증을 반복하며 완성에 다가가는 것이지, 기간 안에 한 번 개발을 완료하는 방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물론 소프트웨어나 AI 프로젝트마다 스프린트나 R&D 범위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많은 경우 짧은 기간 안에 PoC를 진행하고, 필요한 데이터를 보강하고, 모델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며, 결과를 반복적으로 검증하는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피드백 사이클이 어느 정도 설계되어야 개발 프로세스가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다.
넷째,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현 양상을 기획 단계에서도 감안해야 한다. 지금 풀고자 하는 문제가 몇 개월 뒤에는 이미 해결되어 있을 수도 있고, 혹은 문제를 풀고자 하는 방식이 다른 방식으로 변화될 수 있다. 그러한 때가 다가왔을 때는 적절한 기획 수정이 필요할 수 있다.
AI 개발자가 희망하는 AI 기획자의 역할
기획자가 데이터와 (평가지표를 포함한)AI 기술을 이해하면, 단순히 ‘어떤 데이터와 기술을 사용해 어떤 모델을 만들겠다’는 수준이 아니라, 어떤 데이터를 왜 수집해야 하는지, AI의 개발이 사용자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왜 필요한 것인지, 갖는 기술적인 한계는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임원과의 커뮤니케이션 뿐만 아니라 AI 개발자, 디자이너, 사업팀 간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것이 AI 기획자 정체성의 많은 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또한 AI 기획자는 기술 그 자체보다는, 기술이 어떻게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고 비즈니스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가령, AI로 특정 질병을 예측하는 기능을 도입할 때, 단순히 예측 정확도를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기능을 어떤 타겟 유저에게 제공하고, 어느 지점에서 유료화할지, 결과를 어떻게 시각화하여 납득 가능하게 만들지를 계획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데이터에 대한 이해를 AI 개발자와 공유하는 것이다. 한 가지 사례를 언급하면, 종종 “그 모델 개발할 때 데이터는 몇 건이나 필요할까요?” 라는 질문을 받는데, 가장 답하기 까다로운 질문 중 하나다. 특히 내가 속해있는 헬스케어 분야는 규제, 개인정보, 데이터 접근성 등의 이유로 원하는 만큼의 데이터 수집이 쉽지 않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게 정답이기는 하지만 실제 업무에 도움이 되는 답변은 아니다. 헬스케어 도메인의 AI 개발자의 입장에서, 나는 대부분 약 50명(혹은 그 이하) 정도의 데이터를 모아 모델 PoC를 진행하고, 가능성을 확인한 이후 N수를 확장해 핵심 지표를 확인하는 식으로 확장해보자고 제안한다. 이 때, n회차 데이터 수집과 n+1회차 데이터 수집에서 수집되는 데이터의 형태가 크게 달라지거나, 타겟이 변경되는 경우 서로 다른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할지(이전 데이터를 버리거나, n+1회차 데이터 수집에서 하위 호환성을 고려하는 등)도 AI 개발자와 함께 논의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즉, 진행 단계에 따라 필요한 데이터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인지하고, 실제 수집 속도나 비용에 따라 조정하는 역할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온라인에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개발자가 직접 수집, 전처리 할테니 해당사항이 적다.
계속해서 데이터와 평가지표에 대해 강조하는 이유는, 데이터는 서비스의 가치를 높이는 핵심이 되고, 평가지표는 임원(을 비롯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을 설득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AI 기획자에게 바라는 역량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AI 기획자는 어떤 것들을 알고있어야 커뮤니케이션의 가교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이 역시 AI 개발자의 입장에서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본다.
- 이해관계자와의 소통 능력
- AI 서비스가 왜, 어디에, 어떻게 필요한지를 파악해 서비스를 기획하는 능력
- 비즈니스 모델 기획 및 사업 추진 능력
- AI 기술과 일반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세스의 차이 이해
- 데이터셋 구성이나 라벨링, 불균형이나 노이즈 등의 기본적인 데이터 관련 지식
- AI 프로젝트 진행 방식에 대한 이해 (지속적인 개선 구조)
- MVP로부터의 확장 가능성을 고려한 로드맵 설정
- 모델 평가 지표 혹은 벤치마크에 대한 이해
- 어떤 데이터를 누구에게서,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수집해야 할지에 대한 데이터 전략
결론
AI 기획자가 AI 개발자보다 기술을 더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데이터 중심으로 돌아가는 AI 개발 프로세스에서 ‘어떤 데이터를 왜 모아야 하고, 그것이 사용자와 비즈니스에 어떻게 기여하는가’를 설계, 조정, 설명하는 역할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기존 기획자가 모든 걸 다 맡기 어렵다면, PM/PO가 사업적 프레임을 잡고, AI 기획자가 데이터·모델 관련 이해를 더 깊게 챙겨주는 식으로 역할을 분담해도 좋을 듯 하다. AI 개발자 역시 업무 범위를 확장시켜 AI 기획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해서 Glue Work를 양측에서 함께 해결하면서, 임원/디자이너/사업팀에게는 AI 모델의 기능과 한계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사용자에게는 AI가 주는 가치가 와닿도록 구현할 수 있는 AI 기획자가 있다면, AI를 활용한 서비스는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사용자와 시장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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